핵심 요약: 영국 런던 서부 일링 자치구가 콘크리트 구조물 대신 400년 전 멸종한 비버를 재도입해 상습 침수 문제를 완화한 사례가 주목받고 있다. 비버가 만든 습지가 홍수 저감과 생물다양성 회복에 어떤 효과를 내는지, 동시에 어떤 쟁점이 있는지 짚었다.
영국 런던 서부의 한 상습 침수 지역이 콘크리트 저류지 대신 비버를 선택한 뒤, 여러 해 반복되던 홍수가 멈추면서 ‘자연 기반 해법(Nature-based Solution)’의 대표 사례로 떠오르고 있다. 400년 전 영국에서 사실상 사라졌던 비버를 다시 불러들인 실험이 도심 기후위기 대응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무슨 일이 있었나
런던 서부 일링 자치구의 ‘파라다이스 필즈(Paradise Fields)’는 도로와 상업시설 사이에 낀 저지대 유휴지로, 폭우 때마다 도로와 인근 지하철역까지 잠기던 대표적인 상습 침수 구역이었다. 지방정부는 수년간 대형 장비와 콘크리트를 동원한 인공 저류지 조성을 검토했지만, 비용과 환경 파괴 논란이 뒤따랐다.
전환점은 ‘비버를 풀어보자’는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의 제안이었다. 이들은 비버가 나무를 베어 댐을 세우고 습지를 만드는 습성을 활용해, 인공 구조물 대신 자연이 스스로 물을 머금고 흘려보내도록 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결국 2023년, 일링 자치구는 파라다이스 필즈 24에이커(약 9만7000㎡) 부지에 야생 비버 5마리를 방사하는 실험을 택했다.
방사 이후 비버들은 댐과 수로를 만들며 유휴지를 복잡한 습지로 바꾸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만든 작은 댐들이 물의 흐름을 여러 단계로 쪼개고, 낮은 지대엔 얕은 연못과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식생과 곤충, 조류, 양서류 등이 빠르게 늘며 생태계가 회복되는 모습도 관찰됐다.
효과는 홍수 기록에서 확인됐다. 비버 방사 이후 일링 일대에서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큰 홍수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됐다. 기존에는 집중호우 때마다 배수 용량을 넘긴 빗물이 한꺼번에 도로와 역으로 밀려들었지만, 비버 습지가 물을 분산·저류하면서 홍수 피크가 완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왜 중요한가
이번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는 기후위기로 도시 홍수가 전국·전세계적 과제가 되는 가운데, 기존 토목 인프라에 의존하지 않는 대안이 현실 사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버가 만드는 댐과 습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 홍수 완화, 댐과 습지가 빗물을 임시로 저장해 하류로 내려가는 속도를 늦추면서, 단시간에 수위가 급상승하는 현상을 줄인다.
- 가뭄 대응, 저장된 물이 가뭄기에 천천히 방출돼 하천이 완전히 마르는 것을 막고, 기저 유량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 수질 개선과 생물다양성, 느리게 흐르는 습지 환경은 퇴적물과 오염물질을 가라앉히고, 다양한 수생·육상 생물이 서식할 공간을 제공한다.
영국에서는 이미 글로스터셔 리드브룩 등 다른 지역에서도 비버 방사 후 홍수 피해가 줄고, 물 흐름이 안정됐다는 관찰이 보고돼 왔다. 비버가 만들어낸 복잡한 수로망이 자연 ‘스펀지’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도시 입장에서도 장점이 있다. 대형 콘크리트 저류지와 배수 시설을 새로 짓는 데 드는 막대한 예산과 공사 기간, 주민 반발을 감안하면, 일부 지역에서 비버·습지 복원이 비용 대비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번 일링 사례는 이런 접근을 실제 도심에서 검증하는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고 있다.
쟁점
그러나 비버 재도입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버는 강력한 앞니로 나무를 베고 지형을 바꾸는 ‘생태 공학자’인 만큼, 그 영향력도 크고 복합적이다.
- 농경지·인프라 피해 우려, 비버 댐이 상류 농경지나 도로, 민가 주변의 수위를 높여 침수·배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농민과 지자체의 걱정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 기후 영향 논쟁, 북극권 등 일부 연구에서는 비버가 새로 조성한 호수가 영구동토층 해빙을 가속화해 온실가스 배출을 늘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지역과 기후대에 따라 ‘기후 해결사’와 ‘기후 악화 요인’이 동시에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법·제도 공백, 영국에서는 비버가 토착종 지위를 회복했지만, 어디에 어떻게 방사할지에 대한 국가 차원의 구체적 전략과 기준은 아직 정교하게 마련되지 않았다. 농업, 수자원, 지역 경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링 사례 역시 실험적 성격이 강하다. 도시 한복판에 비버 서식지를 조성한 만큼, 주민 안전과 인근 시설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필요시 댐 일부를 조정하거나 개체 수를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비버가 홍수를 줄여 준다 해도, 인위적 개입 없이 방치할 경우 다른 형태의 피해가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사례를 근거로 모든 홍수 문제를 비버에게 맡길 수는 없다. 유역 규모, 지형, 토지 이용 형태에 따라 효과와 위험이 크게 달라지므로, 기존 배수 인프라, 하천 정비, 토지 이용 계획과 함께 종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조 수단’에 가깝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다음에 볼 것
일링의 비버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형이다. 앞으로 관건은 비버 습지가 장기적으로도 홍수 감소에 일관된 효과를 내는지, 극단적 폭우 상황에서도 방어력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주변 환경·주민 생활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은 없는지다.
영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이미 여러 지역에서 비버 재도입 파일럿을 운영해 왔고,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통합 관리 기준을 마련하려는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일링 사례는 “도심 한복판에서도 비버를 활용한 자연 기반 해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도시들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기후위기로 국지성 호우와 도심 침수가 잦아지는 가운데, 저지대 유휴지와 하천변, 공원 등을 활용한 습지 복원·도시 스펀지화 정책은 필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비버처럼 토착 야생동물을 활용한 해법은 생태·사회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지만, “콘크리트 중심의 토목 공사만이 답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공유할 수 있다.
일링의 실험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기후위기 시대 도시는 자연과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과 협업할 것인가. 작은 비버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